.美 연구진, 황우석 시도한 복제 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는 모습. 왼쪽에 보이는 작은 유리관에 난자를 고정한 상태에서 레이저로 난자에 구멍을 낸 뒤, 주사기 같이 뾰족한 유리관을 찔러넣어 천천히 핵을 빼낸다.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현미경으로 확대한 사진. 사진 윗부분에 배아줄기세포가 모여있다. 연구팀은 체세포의 핵과 융합된 난자가 잘 분열하도록 커피에 많이 든 카페인을 넣어 성공률을 높였다.
우리도 기술 충분하지만 규제 완화 필요
미국 연구진이 사람의 피부세포를 난자에 넣어 모든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해 전 세계 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교수팀은 체세포 복제 방식으로 인간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세계적 생명과학저널 ‘셀’ 15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예전 황우석 박사팀이 시도한 방법과 비슷하지만, 학술지 차원에서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쳐 사실로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연구진은 여자아이 태아의 피부세포를 핵을 없앤 난자에 넣은 뒤, 전기 자극을 줬더니 수정란과 비슷한 상태가 되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5~7일이 지나 세포가 150개 정도로 분열한 상태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해 원래의 피부세포 유전자와 비교한 결과 둘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유전적 결함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진이 배아줄기세포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체세포의 핵과 융합된 난자가 제대로 분열되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연구진은 분열을 돕기 위해 커피에 많이 들어 있는 카페인으로 세포를 처리했다. 울산과기대 김정범 나노생명화학공학부 교수는 “이번 연구는 원하는 조직으로 분화시킬 수 있으면서도 유전적 이상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고무적”이라며 “임상에 적용하려면 안전성 문제를 철저히 확인해야 하지만 치료 목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치료 목적에는 역시 배아줄기세포
한때 배아줄기세포는 난치병 환자에게 희소식으로 알려졌으나 황우석 박사팀의 논문 조작 사태 이후로 침체기를 겪었다. 그사이 많은 연구자가 난자를 쓰지 않는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주목했다. 성체줄기세포는 지방세포나 골수 등 인체 조직 곳곳에 있는 미분화 세포로, 배아줄기세포와 마찬가지로 손상된 부위에 이식하면 치료가 가능하다. 그러나 성체줄기세포는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2006년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는 다 자란 피부세포를 배아 상태로 되돌려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를 만드는 데 성공해 줄기세포 연구에 새로운 물꼬를 텄다. 더군다나 iPSc는 난자를 쓰지 않아 윤리적 문제가 없으면서도 배아줄기세포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 지난해 야마나카 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면서 줄기세포 연구의 흐름이 iPSc로 급격히 기울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iPSc는 줄기세포를 만들 때 사용하는 특정 유전자에 발암 유전자가 포함돼 있다는 것. 최근 일본 연구진은 발암 유전자 대신 다른 물질을 넣어 안전성을 확보해 올해 안에 환자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어쨌든 iPSc는 세포 속에 다른 유전자를 임의로 넣어야 하기 때문에 유전자 변이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며 “치료 목적으로만 따진다면 배아줄기세포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엄격한 윤리 규정으로 美에 선수 빼앗겨
국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황우석 박사 사태 이후 급격히 위축됐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위해서는 수백 개가 넘는 난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생긴 윤리적 논란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을 강화해 인공수정을 위해 채취한 난자 중에서 쓰고 남은 것을 제공자의 서면 동의를 거쳐야만 연구에 쓸 수 있게 했다. 이후 차의과대와 제주대 등을 중심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 배아줄기세포 분야에서 이렇다할 연구 성과가 없는 이유기이도 하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도 건강한 난자를 쓸 수 있도록 규정을 완화한 상태다. 제주대 박세필 생명공학부 교수는 “생명윤리법 개정 이후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건강한 세포를 쓰지 못하고 ‘냉동 난자’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커다란 한계”라고 설명했다. 배아줄기세포를 만들려면 난자를 찢어 핵을 빼내고 전기자극을 주며, 화학 물질로 처리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냉동 난자는 이 과정을 버틸 만큼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는 이미 배아줄기세포 기술을 충분히 확보한 만큼 다른 나라 수준으로 윤리 규정만 완화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美, 하시모토 발언에 "언어도단ㆍ불쾌" 첫 공식비판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대표
젠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
존 케리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13년 4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젠 사키 대변인(오른쪽 끝)
"위안부 문제, 중대한 인권침해…역사인식 문제해결 기대"
하시모토 "미국도 일본 점령때 여성 활용…반성하라" 억지
미국 국무부의 젠 사키 대변인은 1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필요한 제도였다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일본유신회 대표의 발언에 대해 "언어도단이며 불쾌한 말이다"라며 정면으로 비난했다. 미국 정부 당국자가 하시모토 대표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비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미국 국방부의 조지 리틀 대변인이 '주일미군이 풍속업(매춘)을 좀 더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에 대해 "말할 가치도 없다"고 논평한 것이 전부였다. 사키 대변인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성을 목적으로 인신매매된 여성들에게 일어난 일은 매우 슬프고, 엄청나게 중대한 인권 침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며 "희생자를 진심으로 동정한다"고 말했다. 또 "일본이 과거와 관련이 있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국과 함께 계속 대처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길 기대한다"고 언급, 일본이 역사인식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른 국무부 당국자는 이날 사키 대변인이 강한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매우 불쾌한 발언에 대해 코멘트를 요구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국무부)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기분 나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키 대변인은 빅토리아 눌런드 전 대변인의 후임으로, 13일부터 정례 회견에 나서고 있다. 사키 대변인과 눌런드 전 대변인은 모두 여성이다. 하지만 하시모토 대표는 미국 측의 이같은 노골적 비판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17일 자신의 트위터에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일본인 여성을 활용했다"며 "(일본인을) 특수한 인종이라고 비판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확실히 일본이 한 행위는 나쁘다"며 "전장에서 성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여성을 활용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도 "현지 여성을 활용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비난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항변했다. "미국은 '공정성'을 중시하는 나라다"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도 반성해야 한다"는 억지도 부렸다. 하시모토는 이날 오후 퇴근길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기자들이 자기 발언의 문맥 전체를 보도하지 않고 트집을 잡는다며 언론에 화살을 돌린 뒤 매주 정례 기자회견 외에는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자신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매체들을 거명하며 "아사히신문 따위는 최악이다. 마이니치신문 그 타블로이드지도 최악"이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주도한 ‘실질적 통치자’ 히로히토 일왕
1945년 9월 27일 일본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찾은 히로히토 일왕(오른쪽)이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손을 뒤로 한 채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맥아더 사령관과 두 손을 반듯하게 내린 채 긴장한 표정의 히로히토 일왕이 대비된다.
히로히토 일왕은 1901년에 태어나 1926년에 일왕이 됐다. 1989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려 63년간 일본에 군림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평생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외면했고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800자의 ‘대동아전쟁 종결조서 선언문’에서부터 자기변명으로 일관했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범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1975년 10월 31일 궁내청 기자회견. 히로히토 일왕이 미국 방문 때 백악관 만찬 석상에서 “내가 깊이 슬퍼하는 그 불행한 전쟁”이라고 한 말을 인용해 한 기자가 “이는 천황이 전쟁 책임을 느끼고 있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일왕은 “그런 언어의 뉘앙스에 대해서는, 나는 그런 문학 방면은 그다지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내각도 이를 뒷받침했다. 1945년 8월 28일 미군 제1진이 상륙하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당시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일억 총 참회론’을 펼쳤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정부의 정책이 옳지 못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국민이 도의에 어긋난 것도 원인이다. 이참에 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 전쟁은 모두가 나빴기 때문으로 일왕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심지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은 다음과 같은 정부 담화를 내놓았다. ‘돌아가신 천황께서는 세계의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일편단심으로 기원하시고 날마다 몸소 실천해 왔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에서 전쟁의 참화로 괴로워하는 국민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결심하셔서,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리셨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일본은 ‘일본제국헌법’을 채용하고 있었다. 제국헌법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일왕은 실제 일본제국의 통치권자였다. 문무관의 임명, 육해군의 통수권, 선전·강화 및 조약체결 등 군사 외교와 관련된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히로히토 일왕은 통수권을 적극 행사했다. 1932년 1월 8일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자위전쟁이라고 옹호하는 칙어를 내렸고 1941년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조서에 서명했다. 일본군은 ‘천황폐하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아시아를 유린했다.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였던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히로히토 일왕의 일생을 추적해 2000년에 내놓은 저서 ‘히로히토 평전: 현대 일본사회의 형성’에서 “쇼와 천황은 반성 없는 생애를 살았다”고 비판했다. 이 책은 이듬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빅스 교수는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전쟁에서 화학무기와 최루탄 사용을 375차례 허가했고, 식민지 국민과 전쟁포로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731부대 창설을 재가했다”고 고발했다. 또 그는 “히로히토 일왕은 명목상의 인물이나 소극적인 방관자, 황실 고무도장이나 서류에 찍는 무기력한 인물이 아니었다”며 “책임의 한계는 항상 모호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폭넓은 군사지식을 갖춘 간섭주의 성향의 역동적 군주였다”고 강조했다. 일왕의 책임을 국무대신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헌법 3조에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고 못 박은 데 이어 55조에 ‘국무대신이 일왕의 의사결정을 보필한다’는 도피 규정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왕의 통수권은 국무대신의 보필에서 독립돼 있었다. 그 근거는 1882년 메이지 일왕이 내린 군인칙유(軍人勅諭)였다. 칙유는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솔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헌법학자인 미노베 다쓰기치(美濃部達吉)는 ‘헌법찰요’(1927년)에서 통수권의 독립 운용에 대해 ‘군국주의의 폐해’라고 비판했다. 또 그는 ‘천황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헌법상의 한 기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라는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주장하다 1935년 귀족원에서 물러나고 다음 해 격분한 우익의 총탄에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에게 있음은 우리 국체(國體·천황과 그의 신표인 곡옥, 거울, 검 등 3종의 신기)의 본의이며 제국 신민(臣民)의 절대 부동의 신념이다”는 내용의 ‘국체 명징(明徵)에 관한 정부 성명’을 냈다. 일본 지도부도 얼떨결에 일왕의 전쟁 책임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육군대장은 도쿄 전범재판 때 군부의 의사결정과 관련해 무심코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자신과 군부가 일왕의 뜻에 따라 침략전쟁에 나섰다고 인정한 대목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현 부총리는 외상이던 2006년 1월 일왕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장하면서 “영령은 천황폐하 만세라고 했지, 총리 만세라고 한 것은 아니다. 천황 폐하가 참배하는 게 제일 좋다”고 말했다. 영령들이 일왕의 뜻을 받들어 전쟁터로 갔다는 의미다.
히로히토에 대한 면책, 일본 우경화의 기반 제공
제2차 세계대전 3대 전범국가 지도자 중 히틀러 독일 총통은 자살했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는 반(反)파시스트 유격대원에게 살해됐다. 유일하게 히로히토 일왕만 처벌을 면했다. 그 이면에는 미일(美日) 간의 거래가 숨어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은 점령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을 맞바꿨다. 1945년 9월 27일 아침. 히로히토 일왕은 중산모를 쓰고 정장 예복 차림으로 붉은색 롤스로이스에 몸을 싣고 궁을 나섰다. 그의 이름은 연합군 전범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었다. 차가 멈춘 곳은 미국 대사관저 앞. 히로히토 일왕이 차에서 내리자 맥아더 사령관이 악수를 청하며 그를 맞았다. 두 사람은 대사관의 큰 거실에서 나란히 선 채 석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일왕을 이처럼 가까이서 찍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에서 히로히토 일왕은 안경을 낀 채 모닝코트와 줄무늬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채 차렷 자세를 취했다. 키 큰 맥아더는 제복 셔츠의 윗 단추를 푼 채 두 손을 엉덩이에 얹은 느긋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많은 일본인은 며칠 뒤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패전의 고통을 실감하면서 일왕이 곧 퇴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신(神)이라는 일왕의 가면을 벗기려는 포석과 함께 나약한 일본 왕의 모습을 연출해 전쟁 책임을 면제해 주려는 맥아더의 치밀한 ‘점령작전’이 깔려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두 사람은 회담 장소로 향했다. 일본 측 통역관 1명만 배석한 채 회담은 40분간 이어졌다. 회담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통역관의 수기가 1975년 언론에 공개됐다.
히로히토: “앞으로는 평화의 기초 위에 신일본을 건설하기 위해 나 역시도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하겠습니다.”
맥아더: “그건 숭고한 마음입니다. 나도 같은 마음입니다.”
히로히토: “포츠담 선언을 정확히 이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얼마 전 시종장을 통해 각하에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맥아더가 당초 면담을 거부하자 시종장을 통해 점령정책에 충실하게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전달했다. 이날 만남에서 일왕은 천황제 존속을 위한 ‘빅딜’에 성공했다. 패전 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일왕은 이날 회담 이후 잠을 잘 잤다고 한다. 1945년 6월 초 갤럽의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7%는 일왕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의 회담 직전인 1945년 9월 18일에는 일왕을 기소해야 한다는 합동결의안 94호가 미 상원에 제출됐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일왕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맥아더가 도쿄에 도착하기 전 700만 명의 육해군을 무장해제했다. 맥아더는 일왕에 대한 국민의 충성심을 역이용하면 점령정책이 수월해지고 일본을 개조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맥아더는 일왕의 신성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1945년 12월 15일 천황제 신앙의 기틀인 국가 신도(神道)를 해체한 데 이어 보름 뒤인 1946년 1월 1일에는 일왕이 신이 아니라는 ‘인간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25일 연합군 총사령부 명의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일왕 불기소 방침을 굳혔다. ‘일왕에 대한 전범재판을 하면 점령계획을 변경해야 하며 일본인들이 복수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로 인해 점령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100만 명의 군대와 수십만 명의 행정관과 전시보급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11개국의 검찰관으로 구성된 국제검사국(IPS) 집행위원회는 같은 해 4월 5일 28명의 피고 명단(A급 전범)을 작성했지만 히로히토 일왕의 이름은 제외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2일 도쿄 전범재판 선고에 따라 도조 히데키 전 육군대장 등 7명의 교수형이 한 달 뒤인 12월 23일 집행됐다. 이날은 아키히토 현 일왕의 생일이기도 했다. 수십 년간 히로히토를 연구한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간세이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저서 ‘히로히토와 맥아더’에서 “도쿄 재판은 주역을 빼놓은 채 도조 일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미일의 합작품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후 일본에서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사실상 터부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왕이 ‘상징 천황’으로 살아남고 냉전 기류에 편승해 군국주의 지도부도 대거 살아나 복권됐다. 이들과 후손이 그대로 일본 정계를 주도하면서 군국주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도 만주국(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 일대에 세운 괴뢰국가) 고관을 지내고 전범으로 기소됐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나치 범죄에 대해 독일은 세대를 이어 영원히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전후 일왕의 전쟁 책임을 묻지 못한 채 우경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역주행과 뚜렷이 대비되는 대목이다.
.역사인식 결여한 아베와 하시모토의 가벼운 언행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역사인식을 결여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폭주(暴走)가 도를 한참 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의 최근 언행은 한국 중국 등 일제의 피해국은 물론이고 양식 있는 세계인의 공분을 사고 있다. 아베 총리는 12일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 ‘731’이라는 편명이 적힌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살아있는 전쟁포로를 생체실험에 이용한 악명 높은 ‘마루타’ 부대가 731부대라 불렸다. 미국 내 여론도 “독일 총리가 재미로 나치 친위대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아베는 얼마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구 경기에서 시구(始球)할 때는 등번호가 96번인 유니폼을 입었다. 개헌 발의 요건을 중·참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규정하는 헌법 96조의 규정을 완화해 평화헌법 개정의 물꼬를 트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두 사례는 모두 아베의 계산된 ‘숫자정치’다.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 겸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는 한술 더 떴다. 그는 “군위안부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제도였다”면서 이를 합리화하려는 듯 주일 미군 사령관을 만나서는 군인의 성적 에너지를 조절하기 위해 매춘을 이용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최악의 인권유린 사례인 군위안부 문제에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강제동원을 하거나 속여서 끌고 간 군위안부와 자발적 매춘을 같은 범주로 보는 발상에서 역사인식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느낀다. 아베 정권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슬그머니 대북(對北)특사를 평양에 보냈다. 국제사회의 대북 공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다. 일본의 최대 현안인 납치 일본인 문제 해결을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 변명할지 몰라도 한국과 미국에 알리지 않고 특사를 보낸 것은 한미공조를 흔들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인 북한의 처지를 이용해 외교적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이라면 치졸한 발상이다. 아베는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경화의 불길을 지피고 있다. 일본 국민은 이를 견제해야 한다. 인류의 보편적 양심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일본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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